적도 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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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프리카 중서부에 있는 나라. 수도는 말라보. 인구는 120만 명이고 영토는 2만 8천㎢로 유럽의 벨기에와 비슷한 크기다. 기니와는 완전히 다른 나라니 주의하자.
2. 정치
대통령제 국가이며 현재 테오도로 오비앙 응게마 음바소고가 1979년부터 독재 형태로 대통령을 하고 있으며 그의 장남인 테오도로 은게마 오비앙 망게가 부통령을 하고 있는데 거액의 현금과 보석을 숨겨 브라질에 입국하려다가 적발되어 강제 귀국 당하기도 했다. 1996년에 군사반란이 일어났으나 실패했는데 여기에 마가렛 대처 전 영국 총리의 아들인 마크 대처가 공범으로 가담했다. 그리고 마크 대처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체포되었다.
3. 자연
대륙에 카메룬과 가봉 사이에 끼어 있는 본토가 영토의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수도 말라보는 본토에서 뚝 떨어진 비오코 섬에 있다. 덴마크[3] 나 아부다비와 비슷한 경우. 다만 다른 둘은 섬 위라도 육지랑 매우 가까워 그냥 육지나 다름없는데, 말라보가 있는 비오코 섬은 꽤 멀찍이 떨어져있다. 오히려 적도 기니 본토보다는 카메룬과 더 가까운 곳에 있으며, 카메룬의 최대 도시인 두알라와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원래 본토의 제1도시인 바타가 수도였는데 본토에서 이격된 저 멀리 외딴 섬에 있는 말라보로 수도를 옮겼다. 현재 말라보는 수도이자 제2도시의 위치에 있다. 이 때문에 본토 지역에서는 정치적 주도권을 비오코 섬 사람들이 다 해먹는다며 그냥 비오코 섬 중심의 적도 기니 중앙 정부로부터 분리독립을 하자는 여론도 간간히 나오고 있다. 결국 여러모로 문제가 되자 본토에 신수도를 건설하고 있다. 기존의 신수도 이름은 오얄라(Oyala)였으나 2017년에 시우다드데라파스(Ciudad de la Paz)로 바뀌었다. 2020년까지 준공 예정.
그리고 이름과는 달리 적도가 본토를 통과하지 않는다.[4] 그저 적도와 가까울 뿐이다. 다만, 안노본 섬과 나머지 영토 사이 바다로 적도가 통과한다. 안노본 섬은 상투메 프린시페와 가까운 섬으로 이 섬의 문화는 스페인보다 포르투갈의 문화에 더 근접해 있다.
4. 역사
4.1. 스페인령 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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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어가 공용어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스페인령 기니(Guinea Española / Spanish Guinea)'로 불렸던 스페인의 식민지였다. 원래 수도가 있는 비오코섬을 1472년에 포르투갈인 탐험가였던 페르낭 두포(Fernão do Pó)가 발견하였고, 1447년에 포르투갈 왕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이후 1788년 엘파르도 조약(Treaty of El Pardo)으로 나중에 스페인 왕국의 식민지로 넘어갔다. 근대까지 이곳은 아메리카로 보내지는 흑인 노예무역이 번성했으며 이곳에서 아프리카인들이 쿠바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다시 아메리카 각 지역으로 보내졌다. 한때 영국 노예상들도 이 삼각무역의 일원이 되어 노예무역 단속을 위해 영국군이 파견된 적도 있었지만, 1844년 스페인과의 협의로 남은 영국인들은 영국령 시에라리온으로 떠났다.
본래 스페인이 영유권을 주장했던 스페인령 기니는 나이저강에서 남쪽으로는 가봉의 오고우에강(Ogooué)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이었지만, 미서전쟁 패배후 맺어진 파리 조약(1898)으로 스페인령이었던 북쪽과 남쪽은 각각 독일과 프랑스에 공식적으로 넘어갔다. 스페인은 남아있던 안노본섬, 비요코섬과 리오 무니(Rio Muni)를 10개 지역으로 합쳐 행정구역을 만들었다.
아무튼 스페인은 이 지역을 점유한 이래 코코아와 같은 상품작물을 재배하기 위한 광대한 플랜테이션 농장으로 개척하고자 했고, 한 때 스페인령 기니의 코코아 수출량은 '''세계 5위에 ''' 이르기도 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비요코섬과 리오 무니 원주민들의 인구가 감소하고, 국제 매판자본이 투입된 강제노동으로 지탄을 받아 한때 유럽에서 적도 기니산 농산물에 대한 불매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결국 국제여론에 밀린 스페인은 1913년 노동법을 개정하고, 1926년, 식민지인의 법적 권리를 규정한 새 법률을 통과시켰다.
한편, 스페인 본토와 쿠바에서 유입된 인구는 페닌술라르(Peninsular)로 불리는 지배계층이 되었고,[5] 에만시파도스(Emancipados)라 부르는 스페인인과의 해방노예의 혼혈인구가 그 다음 지위를 가졌다. 그리고 대규모 플랜테이션 산업으로 적도기니는 인구 유출입이 매우 활발했는데, 나이지리아, 카메룬, 가봉 등에서 대규모 계약직 노동인구가 유입되었고,[6] 상당수는 적도기니에서도 스페인어를 모어로 쓰는 팡족(Fang)이 이웃 카메룬, 가봉, 나이지리아로 넘어가 커뮤니티를 형성하기도 했다. 이러한 영향으로 현재도 카메룬과 가봉에는 스페인어를 모어로 쓰는 인구가 존재한다.[7]
4.2. 스페인 내전
1936년 7월, 왕당파 소텔로의 암살과 함께 스페인 내전이 시작됐을 당시, 내전 발발 후 단 며칠 만에 반란군 손에 넘어간 스페인령 모로코나 스페인령 사하라와 달리 스페인령 기니는 인민전선의 충실한 영토로 남아있었다. 의외로 식민지 지배층과 흑인 중산층은 공화파 인민전선에 확고한 지지를 보냈으며 비오코 섬에 입항한 스페인 해군 경순양함 멘데스 누녜스(ESPS Méndez Núñez)에서 일어난 반란도 수병들이 침착하게 진압시켰다.
그러나 공화파에서 별다른 신경을 못 쓴 사이, 마침내 9월 19일 루이스 세라노(Luis Serrano Maranges)가 지휘하던 기니 식민지 경비대(Guardia Colonial)가 봉기하여 수도 말라보를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세라노는 프랑코 정부의 지시에 따라 총독의 역할을 맡았으며 즉시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민파로 합류하였다. 하지만 아프리카 본토구역인 리오 무니(Rio Muni)는 부총독 미구엘 에르난데즈(Miguel Hernández)의 지휘 하에 여전히 공화파로 남아있었기 때문에 양 측의 내전은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결국 에쿠쿠 강 근처 교전에서 세라노측이 이끄는 반란군이 승리하여 스페인령 기니 전역은 국민파가 차지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원주민들의 희생도 있었다. 승리한 프랑코 정부는 기니 원주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1938년 보다 세분화된 신분법과 자결권을 부여하였으며, 학교, 병원시설을 확충하였다. 사실 프랑코 정부는 모로코에서도 무어인들의 환심을 얻고자 모로코 독립을 언질하기도 했고, 무어인의 지위상승과 뜬금없는 이슬람교에 대한 지지를 보여주는 등, 오직 공화파를 꺾기 위해 식민지인들을 상대로 갖은 유화책을 보여주었으니 딱히 특이한 점은 아니다.
4.3. 독립 이후
2차대전 후 스페인령 기니는 약간의 자치권을 부여받았지만 여전히 스페인 본토에서 파견된 총독과, 원주민, 비 원주민을 구별하는 법률제도와 정책은 원주민들로 하여금 독립의 열망을 싹트게 했다. 때마침 전후 불어온 탈식민주의 흐름에 따라 독립 여론이 일어났고, 1959년 최초로 원주민 출신 의원이 당선되었으며 공식적인 명칭도 '''적도 기니(Guinea Ecuatorial)'''로 바뀌었다.
마침내 1968년 8월 첫 선거와 함께 적도기니는 독립했다. 1968년 9월,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가 적도 기니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10월 공식적으로 독립이 인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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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
그러나 초대 대통령이었던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는 독립 이래로 철권 독재 정치를 펼쳤다. 독립은 했지만 대부분의 자본이 식민지시절 엘리트계층의 손에 있었기 때문에 국가의 부는 매우 고르지 않게 분배되었다. 마시아스 응게마는 1971년 5월에 헌법의 일부 부분을 정지시키고, 1972년 정부를 완전히 장악하고 종신 대통령직을 맡았다. 그는 반대파들을 축구 경기장에서 산타 클로스 옷을 입은 군인들에게 처형시키고, 비아프리카적이라는 이유로 서양 의학 금지, 외국으로 국민들이 달아날까봐 배(船)와 낚시 금지 등의 기행을 자행해대는 통에 통치 말기에는 조그만 나라에서 인구의 절반에 육박하는 10만이 해외로 탈출하는 막장이 되었다.[8] 1978년에 바뀐 적도 기니의 국가표어는''' "마시아스 응게마 외에 신은 없다(There is no other God than Macías Nguema)"'''다. 결국 1979년 조카인 테오도로 오비앙 응게마 음바소고가 쿠데타를 일으켜 삼촌을 처형하고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그 조카 오비앙 응게마도 삼촌보다는 온건하지만 여전히 폭압적 독재자로 40년째 집권 중이다. 2011년 피델 카스트로, 리콴유가 물러나고 카다피가 리비아 혁명으로 죽어버리자 이제 현재 장기집권한 독재자들 가운데 가장 오래 집권한 인물이 되었다. 2006년에 고문금지법에 서명하고, 로또처럼 터진 석유 덕분에 경제적인 성과는 괄목할 만 했지만 여전히 보이지 않는 인권침해는 계속되고, 석유를 통해 벌어들인 국부는 오비앙 응게마의 친척들이 주무르고 있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민주국가는 아닌셈이다. 참고로 오비앙은 2013년 8월에 북한에서 주는 국제김정일상이라는 상의 제 1회 수상자가 되었다.
5. 경제
목재와 커피, 카카오 등 1차 생산물을 위주로 수출하는 최빈국이었다. 독립 당시인 1962년, 적도 기니의 1인당 GDP는 32$에 불과했다. '''1962년 기준''' 대한민국의 3분의 1정도. 그러니까 당시 최빈국 수준이었던 대한민국보다도 더 가난했다.[9]
전혀 눈에 띌 일이 있을 것 같지 않은 아프리카의 소국인 이 나라에 석유가 발견되어 그야말로 '''대박'''이 나고야 말았다. 1996년에 유전이 발견되었고, 여기에 추산된 잠재 매장량이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무려 3위였던 것. 인구 122만 소국에서 이 정도 규모의 유전이 발견되었으니 말 다했다.
이런 오일 파워에 힘입어 2000년대 중반에는 GDP 성장률이 18%대를 찍고 2012년 1인당 GDP가 22,343 달러에 달하는 등, 도저히 아프리카 나라라고 믿겨지지 않는 경제 지표를 자랑한다. 독재자 오비앙 응게마로서는 로또 맞은 셈. 다만 경제의 '''97%'''를 석유 관련에 의존하고 있어 국제 유가에 따라 해마다 국내 총 생산의 변화 폭이 심하다. 세계 경제 위기에 유가가 배럴당 150달러까지 뛰었던 2008년에는 적도 기니의 1인당 GDP가 대한민국을 뛰어넘기도 했다. 심지어 그 당시 적도 기니의 1인당 PPP는 미국보다 높았다. 다만 국제 유가가 큰 폭으로 떨어진 2015년 이후로는 국가 경제가 직격탄을 맞고 1인당 GDP가 2008년 수준의 반토막이 나버렸다. 물론 석유 없어도 콩고민주공화국보단 최대[10] 20배 부유하다.
어렵지 않게 IMF에서 나온 다음 표를 보자.
당연히 기름을 노리는 서방 각국 매의 눈이 총출동해 있으며, 마가렛 대처의 아들인 마크 대처가 적도 기니 쿠데타에 연루되기도 하였다. #
그럼 아프리카의 소자원 부국으로 국민들은 띵까띵까 놀고 먹으며 행복하게 사느냐 하면 그렇다고 말하기도 힘든 것이 정치가 말 그대로 막장이다. 국민 소득이 매우 높기 때문에 부의 재분배가 제대로 이뤄졌다면 아프리카에서 천국 취급을 받았겠지만, 윗대가리들이 해처먹는 정도가 워낙 커서 여기도 전국민이 고루 혜택을 받지 못하기는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 게다가 그 정도가 좀 심해서 실업률만 30%에 달하고 극소수의 사람들이 나라의 거의 모든 돈을 갖고 있으며 대다수의 국민들은 먹고 살기가 많이 힘든 수준이다. 전형적인 자원의 저주. 그래도 전체적으로 같은 대륙의 소말리아, 콩고민주공화국, 남수단, 차드 등의 막장국가들과 비교할 정도는 아니다.
실패국가지수도 47위를 기록하고 있고 이는 파푸아뉴기니, 모잠비크, 필리핀보다 높고 짐바브웨와 비슷한 수준이다. 마다가스카르는 1인당 소득이 이 나라의 1/20 정도밖에 안 되지만 실패국가지수는 61위로 오히려 낮다.
한때는 아프리카에서 한국보다 1인당 구매력 평가 기준 국민소득 GDP가 앞서는 유일한 나라였지만, 2017년 10월 IMF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한국이 다시 적도 기니를 추월하면서 2017년 10월 기준 아프리카에는 한국보다 1인당 PPP가 높은 국가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통화는 중앙아프리카 CFA 프랑.
6. 문화
적도 기니는 아프리카에선 유일하게 스페인어 사용국이지만, 지역별로 차이가 있다. 스페인의 지배를 받았던 비오코 섬은 스페인 문화가 남아 있고 스페인어가 사용되지만, 육지 지역은 프랑스의 지배를 받아서 프랑스 문화와 함께 토착 문화가 남아 있다. 안노본 섬은 포르투갈의 영토가 되었다가 스페인에게 넘어갔지만, 포르투갈의 문화와 영향이 남아 있다.
6.1. 언어
아프리카에선 유일한 스페인어 사용국이라서 스페인어가 공용어이다. 그 외에도 프랑스어도 공용어에 포함되어 있어서 프랑코포니 회원국이다. 또한, 팡어를 포함한 토착어도 쓰이는데, 나라가 작고 인구도 적어 다른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 국가들처럼 여러 부족들이 섞여 있으나 팡족(Fang)이 80% 이상으로, 다수를 차지하고 있기에 쓰이는 것이다. 비오코 섬 지역에선 스페인어가 널리 쓰이고, 육지 부분은 프랑스어와 팡어가 쓰이고 있다.
한때는 포르투갈어가 공용어인 적도 있었고 포르투갈어 사용국 공동체에도 가입되어 있다. 이는 스페인의 식민 지배 이전에 포르투갈의 지배를 잠깐 받았던 것과 포르투갈어권인 상투메 프린시페가 인접국인 것을 구실로 가입한 것이다. 그러나 적도 기니에서 포르투갈어는 쓰이지 않는다. 정치적 목적으로 명목상으로만 헌법에 잠시 등록했을 뿐이고, 2012년에 개헌하면서 포르투갈어는 공용어에서 빠지게 되었다.
6.2. 스포츠
2012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을 가봉과 공동 개최하여 대회 8강에 올랐으나 씁쓸한 8강이다. 사실 공동 개최국인 가봉의 8강 진출이 더 큰 주목을 받았다. 둘 다 8강에 진출했지만 링크된 기사를 보면 적도 기니의 8강은 돈으로 이루어진 귀화 선수들로 이뤄졌다. 그나마도 잠비아에게 패하며 고전하는 모습을 보였기에 되려 튀니지, 모로코라는 만만치 않은 상대를 대상으로 전승을 거두며 올라간 가봉이 더 선전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여하튼 8강전 상대는 바로 드록신이 있는 코트디부아르. 결국 드록신에게 2골 허용하면서 3:0 완패로 8강에서 탈락했다.
2013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에선 최종 예선에서 콩고민주공화국 원정에서 당한 0:4 대패를 넘어서지 못하고 탈락했다. 2015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에선 2차 예선에서 모리타니를 상대로 합계 3:1 승리하였으나 부정선수로 인하여 실격했지만 모로코가 2015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개최를 거부하고 결국 개최권을 박탈당하면서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은 적도 기니 축구 협회는 허공에 놓인 개최권을 가져오는 데 성공한다. 外 결국 적도 기니는 개최국의 자격으로 2015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에 진출한다. 그리고 홈빨을 내세우며 4강까지 진출했다.
이 나라가 작은 화제가 된 일이라면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남자 수영 100미터 경기에 나온 에릭 무삼바니 때문이다. 대회에서 꼴찌를 하고 자세도 너무나도 엉성했지만 그래도 완주를 했던 그는 정작 수영 훈련도 제대로 못 받고 온 아마추어였다. 이 나라에는 수영장이 고작 20미터짜리 호텔 수영장이며 거기서조차도 연습도 별로 못한 채로 나와서 성실하게 완주하는 자세를 보여 화제가 되었다. 링크 그 유명세에 독재자인 오비앙 응게마는 기분 나쁘게 여겨 호텔 수영장 훈련 시간조차도 금지시키는 짓을 저질러버렸다. 결국 2004년의 2004 아테네 올림픽에는 나오지 못했다. 이 부분은 2018년 9월 9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뤄졌다.
7. 군사
8. 외교
9. 기타
이름이 비슷한 기니와 기니비사우, 파푸아뉴기니도 있는데 (파푸아뉴기니를 제외한) 현 아프리카 국가들 대부분이 그렇지만 이런 이름을 갖게 된 것은 과거 식민지 시절의 여파 때문이다. (파푸아뉴기니를 제외한) 이들 '기니' 국가들의 공통점은 아프리카 서쪽 기니 만에 위치한 국가라는 공통점이 있는데, 이들 국가들의 식민 주체는 서로 다른 국가[11] 였다. 때문에 지배국들이 각자의 식민 구역을 '기니', '적도에 위치한 기니(적도 기니)', '비사우에 위치한 기니(기니비사우)'로 구분해서 부른 게 아예 국명으로 굳어버린 케이스다. 파푸아뉴기니는 갓 진출한 유럽인들이 현지의 기후와 사람들이 기니와 비슷하다 해서 뉴 기니로 부른 게[12] 국명이 된 케이스.
10.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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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노본 섬은 저 위치에 있는 게 아니라 적도 기니 본토에서 남서쪽으로 멀리 떨어져 있다. 지도를 안노본 섬이 있는 곳까지 확장하기가 곤란해서 붙여넣기 형식으로 넣은 것.[13]
이 지도에선 안노본 섬이 비오코 섬보다 조금 작게 묘사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17km2로 2,017km2인 비오코 섬의 약 0.8% 정도로, 비오코 섬 안에 안노본 섬 118개가 들어갈 만큼 매우 작다. 대한민국의 행정 구역과 비교해서 설명하자면, 안노본 섬은 서울특별시 광진구 면적과 비슷하고, 비오코 섬은 제주도보다 약간 크다. 정확히는 제주도 면적의 1.1배정도.
[1] 포르투갈의 경제 지원을 받기 위해 포르투갈어를 공용어로 지정하고 포르투갈어 사용국 공동체에 가입되어 있지만 2012년 헌법 개정으로 인해 포르투갈어가 빠졌다. 포르투갈은 그래서 공식 가입국이지만 비공식 가입국인 마카오와 동급으로 취급해서 경제 지원도 잘 안 해 준다.[권위주의] 1.92점[2] 대통령의 아들이다(...).[3] 수도인 코펜하겐이 유럽 본토(윌란 반도 북부) 유틀란트 반도가 아닌 동쪽의 셸란 섬 끄트머리에 있다. 다만 셸란 섬은 교량으로 유럽 본토(서쪽의 유틀란트 반도 및 동쪽의 스칸디나비아 반도)로 연결되어 있어 그냥 본토로 취급되는 경우가 많다.[4] 다만, 가봉에 맞닿은 남쪽국경선은 정확히 북위 1°에 위치해 있다.[5] 스페인 제국의 아메리카 식민지 상층부를 형성한 본토출신 귀족들을 지칭하는 용어기도 하다. 이들은 적도 기니 농토의 대부분을 소유했다.[6] 라이베리아로부터도 1913년 노동조약을 통해 많은 수의 노동자가 적도기니에 유입되었지만 1930년 국제노동기구의 항의로 중단되었다.[7] 이런 영향으로 현재 적도 기니는 카메룬, 가봉과 완전한 국경을 확정하지 못하고 종종 분쟁이 일어나는 중이다.[8] 이를 Equatorial guinea diaspora라 부른다. 이들과 함께 수만명의 나이지리아 노동자들도 함께 추방되었다. 떠난 적도기니인들은 인근의 가봉, 카메룬, 나이지리아에 정착했고, 이들은 식민지 시절 정착한 인구와 함께 현재까지 스페인어를 모어로 쓰는 커뮤니티를 형성했다.[9] 프레더릭 포사이드의 첩보 스릴러《전쟁의 개들》(74)에서 등장하는 가상국가 '쟝가로'가 적도 기니를 모델로 하고 있으며 1972년 유럽인 용병들이 기도했다 실패한 쿠데타 모의에 포사이드가 '''고용주'''중 하나로 참여했다는 의혹이 있다.[10] CIA 월드팩트북 기준 $50200.[11] 기니는 프랑스, 적도 기니는 스페인, 기니비사우는 포르투갈.[12] 뉴욕도 뉴욕에 진출한 영국인들이 영국의 요크 지방과 느낌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뉴 요크라고 부른 게 시초가 되었다. 그 이전엔 더 먼저 진출한 네덜란드인들이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 지방과 느낌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뉴 암스테르담이라고 불렀었다.[13] 실제 저 '''방향'''에는 상투메 프린시페가 있다. 상투메 프린시페 자체가 적도기니의 안노본 섬과 비오코 섬 사이에 고스란히 끼어있다.